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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전쟁을 테마로 다루고 있지만, 그 의미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의 모습을 반추하고 있다.”

“역사현장-벽”
부서진 건물의 잔해와 부상자들의 신음 소리와 가족을 잃은 者들의 절규가 어디선가 들려올 것 같은 장면들. 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은 영화 속의 주인공이 전흔만이 휘감아오는 황량한 폐허를 바라보며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라고 외치는 듯한 장면들. 성태훈의 작품은 인간의 비극을 잉태하는 전쟁을 소재로 한다.
21세기의 휘장을 걷자 2차 세계대전 당시 수세에 밀린 일본의 군인들이 미국의 항공모함을 향해 비행기에 몸을 실어 자폭하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9. 11 테러 사건. 테러에 대한 응징보다는 자유의 여신상의 이념으로 미국의 위상을 회복하자던 자성의 목소리를 외면한 뒤이은 전쟁. 이제는 21세기가 인류의 새로운 희망과 비전을 줄 '문화의 세기'라고 들뜨던 소리는 점차 사라지고 사람들은 전쟁의 소식들에 무딘 시선을 던진다.
휴머니즘이 사라져서 인가. 이라크 전쟁을 배경으로 한 성태훈의 이번 전시는 다시 그러한 의문을 제기하며 그 시선으로 향하게 한다. 작품들은 비극적인 전쟁의 장면이라기 보다는 가을날의 서정성을 느끼게 하는 한 폭의 정경으로 보인다. 화면들은 딸인 윤서를 모델로 한 어린아이를 전면에 등장시키고 전쟁터의 배경 화면은 악간은 흐릿한 톤으로 그려져 있다. 사람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게 하는 황토색으로 연하게 칠한 전쟁터의 배경화면은 차라리 낡은 건물을 부수어 놓은 공사장의 장면과도 같으며, 전쟁의 배경화면을 바라보는 어린아이는 일상의 삶의 모습을 영위하는 평온한 모습이다.
전쟁이 이렇게 서정적인 것인가. 아니면 작가가 전쟁을 체험하지 못해서 그러한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없는 것인가. 그런데 작가는 이미 자신이 체험하지 않은 동학과 광주 5.18의 역사 현장을 실경(實景)으로 그린 첫 전시『역사현장실경』에서 칠흙같은 어둠과 붉은 채색으로 짓눌린 민중의 격한 감정과 울분이 봇물처럼 터져 나와 그 일대를 휩쓰는 광경을 강렬한 느낌으로 묘사한 바 있다.
이번 전시『역사현장-벽』에서 9.11테러를 소재로 다룬 지난 전시인 『역사현장-공존』과 같은 채색 톤으로 서정적으로 그린 의도는 무엇일까. 이번 전시에서 작품들은 등장인물인 어린애는 지난 전시와는 달리 배경 화면을 바라보고 있거나 옆을 향해 비스듬히 바라보고 있다. 지난 전시의 어린아이가 앞을 마주보는 것과는 달리 이번 전시의 인물의 묘사는 일어난 사태에 대해 격한 감정을 야기하거나 또는 파토스(pathos)를 유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황토색과 함께 깊은 사색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품 속의 어린아이는 형상만 어린아일 뿐 표정은 어른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물론 화면의 등장인물은 딸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어린 딸은 어른과 같이 깊은 상념에 잠겨있지 않다. 바로 화면 속의 어린아이는 작가의 마음의 표상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작품 속의 상징물과 배경화면을 통해 무슨 말을 전하고 싶은 것인가. 작품 속의 어린아이의 배경과 전쟁터를 묘사한 무대 배경간에는 채색과 사물들의 형태의 크기로 분리된 공간임을 보여 준다. 이러한 분리된 공간은 주인공인 어린아이의 삶과 이라크 전쟁터와는 먼 거리에 있으며, 심리적으로도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그 벽은 일상에서 보는 벽이 아니라 동독과 서독의 분단을 가로지르는 베를린 장벽을 부수며 노래한 가수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영화 주제음악 "The Wall"과 같이 서로 간의 이념으로 생긴 보이지 않는 벽이다. 그리고 문의 기호는 이러한 사실을 재확인시켜 준다.
문과 수돗물은 또 다른 알레고리로서 이해될 수 있다. 문은 한 공간과 다른 공간을 통하는 상징물이며, 수도의 파이프라인도 벽을 뚫고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어지는 상징물로서 작용한다. 그리고 그 상징물의 의미는 '인간은 독립된 섬이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하나의 대륙으로 연결된 존재들이라는' 밀턴의 실낙원의 시의 구절을 연상시킴으로써 이 두 공간이 서로가 무관한 공간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우산은 비를 피하는 보호물이지만, 또한 자신이 자유롭지 못한 행동 공간의 심리적인 상황을 의미한다. 분리된 두 공간에서 내리는 비는 자연에서 생성된 비를 의미하지만, 전쟁터의 음울한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는 인간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빗어내는 갈등의 산물일 수도 있다. 작품 속의 어린아이의 상징물은 동양에서 말하는 순박한 마음을 의미하며, 인간의 사유의 여정은 낙타와 같은 시기에서, 사자와 같이 포효하는 시기를 지나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해진다는 니체의 철학적 사유에서도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작품 속의 배경과 상징물의 의미를 종합하면 우리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 볼 수 있다. 서로 간의 이념은 보이지 않는 벽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즉 강자와 약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등의 이념들은 흑백의 논리로서 인간 서로를 소통시켜주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보다는 장애물이 된다는 것이다. 일상의 삶에서 서로의 주장만 고수하는 것은 서로 간의 충돌과 재난을 불러오며, 그것은 급기야는 전쟁으로 확대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전쟁의 종식은 문 앞에 서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처럼 서로의 이념에서 벗어나 서로를 이해할 때 가능함을 이야기하며, 그때에야 어린아이로서 상징화시킨 다음 세대에서 폐허가 아닌 풍요로운 세상을 물려줄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기에 작품은 전쟁을 테마로 다루고 있지만, 그 의미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의 모습을 반추하고 있다.
가는 전시를 거듭할수록 실경(實景)보다는 사의(寫意)를 통한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것은 역사의 현장, 삶의 현장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우리의 삶과 무관한 이상적인 세계가 아니라 삶을 매개로 하여 찾아야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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