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공포증과 물 이미지
벽으로 부터의 반추
한국의 모든 비극의 근원이 분단에 있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분단은 극명하면서도 모호하게 펼쳐져있다. 그것은 실시간으로 실감나게 다가오다가도 아득하게 가라앉아 자취를 감춘다. 한국 중산층 대부분은 막연하게나마 전쟁공포증에 시달리고 그것이 현재의 삶에 부단히 족쇄로 작용하고 있음을 본다. 우리의 삶을 전면적으로 차단하거나 굴절시키는 분단, 결국 전쟁공포증은 한국 전쟁 이후 한국현대사의 정치와 체제의 안전판으로 기능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그것은 곧 들이닥칠 공포를 극대화해서 불안감을 심어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의 청사진을 약속하는 정신분열증적 삶의 강요였다. 지금도 분단과 전쟁의 공포는 연평도 연해에서 철책 선에서 강원도 해변 가에 떠오른 잠수정에서 매스컴에서 핵관련 기사에서 6자회담에서 미국과 북한의 힘겨루기에서 광화문 사거리의 반공데모에서 국회에서 수시로 돌출한다.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분단과 전쟁공포증을 근자에 작업으로 다룬 이는 강홍구, 박찬경 그리고 정동석, 정인숙 등의 분단풍경사진이 떠오른다.
성태훈은 전쟁과 테러로 인해 폐허가 되어 버린 공간, 건물의 잔해와 뒹구는 돌, 철근 덩어리들이 가득한 장면을 어둡고 흐릿한 분위기의 배경으로 그려 넣고 이를 무대로 마치 오려 내거나 절취한 부분처럼 텅 빈 공백, 그려지지 않아 비어있는 부분을 음화의 공간으로 해 이를 수도꼭지나 분무기에서 흐르거나 뿜어져 나오는 물의 형상화로 처리되고 있다. 물을 표현하기 위해서 물을 그리기 보다는 그 주변을 칠하고 어둡게 처리해 상대적으로 그려지지 않은 부분을 강조하는 형국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같은 이중의 화면공간은 그 두개의 다른 상황설정과 그것들 간의 긴장과 대비를 강화한다. 보는 이들의 시선은 배경과 그려지지 않은 부분의 윤곽을 따라가면서 실재하는 사물을 연상한다. 이 그림은 그런 연상 작용을 자극하는 편이다. 그에 따라 관자를 참여시키는 한편 보는 이의 시선을 다소 헷갈리게 한다. 결국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부분이지만 그 나머지 공간의 도움을 받아 여백은 비로소 형상으로 다가온다. 무(無)로써 이미지를 생성하는 그런 그림이다. 그려지니 않은 부분이 그려진 부분과 동일하거나 그것을 넘어서는 의미를 품고 있다. 이 그림은 음과 양, 가득 찬 부분과 텅 비어있는 부분, 미점으로 울울한 장면과 종이 자체의 질감과 색감, 검은 색조와 흰색과의 대조, 과거의 시간과 현재, 기억과 현실, 절망과 희망 등의 이분화 된 요소들 간의 차이가 대립적이면서도 상호보완적으로 얽혀있다. 그리고 이 차이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전달하는 단어, 문장의 역할을 한다. 동향화의 전통적인 여백의 기능이 여기에서는 한 화면에 겹쳐지는 또 다른 상황의 오버랩으로 작동한다. 다른 시간과 공간이 연출이 그것이다.
그런가하면 여전히 먹과 붓질의 여러 효과와 쓰임새를 고려해서 필묵을 다변화하는 시도가 한 축으로 유지되면서 현실의 시사적인 주제의 일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그림이다. 전통적인 동양화 본래의 기법과 특질이 구사되면서 동시대의 시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를 아우르려는 의도에 따른 두 결합은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동양화의 일반 수순을 따르고 있지 않다. 그것은 수묵으로 구체적인 정치, 사회적 이슈나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담아낼 수 있는 한 가능성이나 시도인 한편으로 자기가 사는 시대와 삶에 대한 반성의 기능으로 그림을 대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성태훈의 그림은 다분히 시사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것은 침묵으로 굳은 문장이다. 인류의 보편적인 재앙이나 참사, 폭력의 한 형태인 전쟁과 테러를 통해 위태로운 현실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이 상대적 거리에서 쏟아지는 물, 분수처럼 샤워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있다. 화면에 배경으로 깔린 장면은 동시대의 여러 참혹한 전쟁, 테러의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 자료를 참조로 해서 구성했으며 전면에 등장하는 화장실, 샤워기, 수도꼭지는 자신의 집 화장실 풍경이다. 화장실이란 지극히 사적이면서 편안한 공간이다. 전쟁, 테러와 화장실의 대비는 극단적인 공포와 편안함의 대비를 극화하기 위한 설정으로 보인다. 또한 물의 형상화와 물을 통한 의미부여는 중요해 보인다.
알다시피 물은 정화나 정수의 의미를 지닌다. 땅이 받아들이는 물은 삶의 근원을 상징한다. 물 속에 뛰어든다는 것은 근원으로 되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런가하면 물은 생명의 액체, 생명의 근원을 상징한다. 동양적 사유의 근간은 모두 무로부터 비롯되었다. 카톨릭에서는 물로써 원죄를 씻는다는 인식 아래 물은 정화의 상징이자 그리스도의 표상이기도 하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물이 만물을 재생시킨다고 믿었다. 그런가하면 물은 재생에 필요한 망각을 가져다준다고 말해지기도 하고 물 자체가 지닌 맑음이 부정을 물리친다고 믿기도 했다. 성태훈은 물이 지닌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끌어들여 재앙과 대비시키고 이를 정화하고 닦아내 희망찬 세계상을 그려보고 싶어 한다.
근작에서는 물의 표현이 좀더 두드러지게 자리하면서 다양한 형상이 자리한다. 사실 물을 주로 그리고 표현했던 것이 동양화인데 동양에서는 물을 그리고 물을 완상하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정화와 심신의 수련과 관계되는 한편 우주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그 기운을 내면화하는 복합적이고 심오한 행위였다. 아울러 현실로부터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한편 때를 기다리고 헤아리는 지혜의 은유이기도 했다. 또한 동양적 사유의 근간이 대부분 물을 근거로 하고 있음도 상기해볼 수 있다.
성태훈은 정화와 희망, 씻어냄과 치유 등등의 상징적인 의미로 물을 화면 가운데에 여백처럼 설정해놓았다. 전통회화에서 보는 물 이미지와 일정부분 공유되는 메시지를 드러내는 한편 동시대의 수묵화와 물의 의미를 현실적인 주제와 결합시켜 오늘의 이야기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