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한 시대도 또 그렇게 흘러간다
성태훈의 근작들은 동시대 삶의 정황을 성찰하는 폐허 그림 연작들을 물 이미지와 결합함으로써 2002년의 개인전 “역사현장-공존” 이래 지속된 폐허와 일상의 중층구조를 씻김의 미학으로 이어낸 작업들이다. 그것은 장구한 세월 동안 서서히 망가진 역사유적에서처럼 시간과 공간이 응축된 폐허의 미학을 찾는 일이 아니라, 자본과 권력의 작동으로 부서지고 망가진 파괴의 현장에서 동시대의 상처와 고통을 돌아보는 그림들이다. 따라서 성태훈의 폐허는 동시대의 현실을 표상하는 하나의 사물이자 사건이다. 그는 전쟁과 테러에 의해 파괴된 삶의 터전을 일상의 공간 위에 중첩하여 보여줌으로써 우리 삶에 내재화 한 폭력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했으며, 이번 전시에 출품하는 최근작들을 통해서는 이 모든 상처들을 물로서 씻어내는 씻김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다.
벽과 폐허
미점으로 가득 찬 연묵의 벽 위에는 전쟁과 테러의 상처들이 새겨진다. 2001년 9.11에서 시작한 쌍둥이 빌딩 붕괴 현장은 몇 년 지나서 이라크의 폭격과 테러 현장으로 전이되었다. 폐허의 건물 잔해들은 연묵의 점들 위에 그려졌으므로 명암의 극명한 대비를 강조하지 않은 채 흐릿하게 형상을 드러낸다. 때로는 농묵에 날카로운 필선으로 부서진 건물 잔해를 드러내기도 하고 연묵의 번짐으로 포연이 자욱한 폭력의 흔적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성태훈의 화면에서 꿈틀거리는 필치와 기가 막힌 먹의 번짐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극명한 대비로 명쾌하게 절벽을 그려내는 부벽준(斧劈?)의 기억도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폐허를 그린 그의 필은 붓질의 법을 따라 붓이 가는 길을 정형화하는 따위의 갑갑한 틀거리와는 무관하게 ‘콘크리트준’이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벽은 벽이 아닌 부분으로 설정한 바닥의 그리드 담채에 의해 비로소 벽으로 자리를 잡는다
폐허와 물
성태훈은 물을 그리지 않음으로써 물을 드러낸다. 벽으로부터 나온 샤워기 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는 물이 아닌 부분으로 인해서 비로소 그 형상을 갖춘다. 세면기와 샤워기가 동시에 등장하기도 하고, 샤워기 호스가 꼬여서 연출되는 유연한 곡선의 흐름이 도드라져 보이는 사워기 자체만 등장하기도 한다. 수직으로 낙하하는 물줄기가 있는가 하면, 사선으로 분출하는 물줄기, 마치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들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물의 형상 또는 물을 유인하는 형상들은 그려지지 않았거나 덜 그려졌다. 따라서 성태훈의 그림 속에서도 그려지지 않은 여백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어있음으로 귀환하는 여백이 아니다. 그 여백은 동시대의 가치를 담보함으로써 정치적인 의미망 속으로 그 해석의 지평을 넓혀내는 속이 꽉 찬 비어있음이다.
물과 서사
물은 성태훈의 폐허그림을 더욱 단단한 서사체계로 구조화 하고 있다. 최근작의 물은 폐허와의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대화를 시도한다. 폐허 위에 등장하는 물 이미지의 기본 구도는 폐허의 어두운 상처를 물로써 씻어낸다는 설정에 따른 것이다. 성태훈은 폐허와 물이라는 이원적인 대립항을 통해서 어두움과 밝음, 상처와 치유의 메시지를 구조화 하고 있다. 폐허는 동시대의 상처를 드러내는 기표들이다. 물은 생명과 희망을 담은 또 다른 대안이다. 물을 통한 씻김은 동시대의 상처를 딛고 넘어서고자하는 치유의 표상으로서 상처의 치유를 갈망하는 동시대의 정신적 가치를 담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사회적인 의미망 속에 포섭되는 정치적인 물이다. 물을 끌어들인 성태훈의 폐허 그림은 현실을 투영하는 재현적 형상회화로부터 상처치유의 메시지를 담은 제의적 형상회화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한다. 먹그림을 서정성을 표출하는 미디어로만 써왔을 뿐 구체적인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예술적 미디어로서의 보편성을 가지는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은 성태훈의 그림을 보다 적극적으로 서사적인 체계가 구조화하도록 했다.
성태훈이 벽과 폐허 이미지 위에 일상의 오브제나 장면을 담는 구도는 어느덧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잡아왔다. 그것은 주로 아이와 폐허, 일상 공간과 폐허의 중첩이었다. 그는 금새 굳어질지도 모르는 스타일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으로 물을 끌어들였다. 성태훈은 먹이라는 매체가 자연친화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먹은 물과 만나 종이위에서 다채로운 모습을 보이는 회화재료이다. 그는 그 먹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을 서정성으로 인식하고 있다. 성태훈의 이와 같은 인식은 서정성을 가진 먹이라고 하는 매체를 서사성과 결합하겠다는 의도로 이어진다. 이것은 마치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가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던 아도르노를 연상하게 한다. 전쟁과 폭력이 난무한 동시대의 삶의 지평 위에서 그 어떤 서사성도 거부하는 진공상태의 서정적인 풍경화가 무슨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겠느냐는 반문인 것이다.(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