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풍경 ; 폭력과 불안과 공포를 어찌할 것인가?
길을 묻는다
김노암(미술비평)
중무장 헬기와 폭격기들이 한국화의 화면 요소요소를 점거한 채 비행시위를 벌인다. 세면대 물줄기에서 핵항공모함이 등장하고 007처럼 살인면허를 소지한 네이비씰이 칼을 들고 등장하기도 한다. 내밀한 사적 공간은 세계의 전쟁터와 마치 탯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한편으로 무시무시한 전쟁터인 것이다. 현대 첨단 병기들과 한국화의 어처구니없는 이 특이한 결합이 결정적인 조형(?)요소로 채택하고 있는 점이 이 전시를 특징한다. 그런 차원에서 서서 우리는 경쾌하고 순박한 쾌감의 향연을 벌이면 그만이다? 아니면 다른 차원에 한발을 내디뎌서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러한 이상한 만남은 미국에 밉보인 또 엄청난 석유매장량을 자랑하는 이라크에 대한 정의의 심판에 대한 충정어린 헌상獻上인가? 아니면 미국이 벌인 정의롭지 않은 전쟁에 대한 엄중한 비판인가. 또 미국과의 관계가 운명으로 여겨지는 한국의 동참에 대한 역설적 냉소인가.
지난 시기 성태훈은 9.11 테러와 그로인한 폐허의 잔상들을 그렸다. 또 그 잔해 속에 서 있는 자신의 어린 딸을 통해 다음 세대가 우리 세대의 폭력과 불안과 공포 속에 성장하고 살아가야하는 현실을 표현하였다. 우린 이 일련의 시리즈의 연속선상에서 이번 전시를 감상할 수 있다. 이미 우리는 테러가 일상이 된 세계 속에 거주한다. 그것은 제1세계이건 또는 제 3세계이건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한 예외는 없다. 그 가운데 예술가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세계를 꿈꾸는가. 우리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깊은 산중 산사를 찾아가는 중인가? 아니면 북적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운명이 흥미진진한 사건을 만들어내는 메트로폴리스를 찾는 것인가?
전통적 삶과 의식 속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은 불과 백년이라는 짧은 기간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경험하고 전쟁과 민족의 분단과 고통과 공포를 깊이 내재화하면서 자본주의의 현실로, 현대세계로 편입되었다. 또한 이런 경험은 한국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서구문명의 발전과 확장은 필연적으로 다른 세계를 향해 진군하였고 이는 보다 심화된 폭력과 모순과 불안의 세계를 낳았다. 과거 인류가 경험하였던 생존을 둘러싼 원형적인 불안과 공포에 더불어 인류가 스스로를 옥죄고 자연의 공포에 문명의 공포를 더하였다. 이렇게 재생산되면서 질적으로 더욱 정교해진 불안과 공포가 우리 시대의 스팩타클이 되었다.
그런데 20세기의 수많은 예술가들은 이러한 세계를 두려워하고 경계하였고 도전하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가 문제투성이의 세계로 무한히 확장하고 융합하는 기괴한 괴물의 형상으로 변해가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인가 회의하였다. 다원적 가치의 단선적 진보와 획일적 가치로의 환원을 보았고 자유와 조화의 세계는 한갓 몽상가의 꿈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이는 동서를 막론하고 예술을 통한 삶과 경험의 표현과 질적 풍요를 꿈꾼 사람들 모두가 처한 현실일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는 전혀 가능치 않은 문제인가?
현대예술은 사회와 역사와 정치에 정당한 발언을 하기 시작하면서 탄생하였다는 설을 따라서 작가는 예술이 처한 오늘의 현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비해 자본주의 문화와 깊이 결합한 현실 속에서 어떤 사회적 발언과 정치적 발언 그리고 그 발언 과정에서 의미 있는 예술로 거듭날 것인지 질문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관습적 틀과 일상을 벗어버리고 다른 차원의 시선과 의식을 모색하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은 물론 다른 이들과의 관계의 진정성을 찾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처한 현실의 모순과 생활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한국화를 매개로 표현하고 사색한다. 작가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이미지들 속에서 메시지를 읽는다. 어떤 비전과 힘을 느껴보는 것. 그리고 대화를 시도하는 것. 가능한 태도와 행동을 촉구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