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섭(전시기획자, 미술비평) ▶ 왜 작가는 자신에게 길을 묻는 가? (제 12회 개인전)

by 성태훈 posted Jan 0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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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태훈 전시에 부쳐

왜 작가는 자신에게 길을 묻는 가?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에서 일상이 제외되어 있거나 비일상적인 상황을 전제하면서 사용하는 ‘특정한 그 말의 뜻’을 찾아낼 수 있다. 비일상적 뜻을 일상적 언어로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그 빈도수에서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더 많기도 하다. 누구라도 자신의 언어습관을 잘 생각해보면 자신이 한 말들이 진정으로 비일상적 상황을 가지고 일상적 대화 안에서 무작위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고선 깜짝 놀랄 것이다. 일상은 무엇이고 비일상은 무엇인가. 그 구분의 기준은 어디서 구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문제가 왜 한 작가의 작품과 전시에 부치는 글의 내용이 되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상적 언어와 비일상적 언어의 구분은 삶의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묶여진 규범 안에서 찾아진다. 하나는 사회의 공유이고 하나는 문화의 공유다. 문화의 공유, 같은 문화권이 유지하는 일상성은 항상 언어의 차이를 가진다 해도 그 뜻의 차이는 없다. 그러나 사회의 공유란 그 사회에 대한 인식과 반응적 태도에 의해 말과 뜻 모두가 상이하게 사용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이 사회 공유 부분은 지난한 현대사만큼이나 잘게 나뉘어져 있어 하나의 사실, 실제함을 보고도 다른 언술을 늘어놓는 또 다른 사실들을 목도할 수 있다. 비일상적 언어의 사용, 마을공동체 안에서 벌어질 수 없었던 이런 언어현상들은 대도시의 삶에서 보다 극명하게 드러나고 사회적 관심 영역이 관점주의를 통해 넓어진 이해를 요구하는 삶의 방식에서 드러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화만이 유일한 생존의 법칙으로 소개되는 탈문화의 현상에서는 더욱 쉽게 이러한 언어와 뜻의 불일치가 흘러넘치게 된다. 대중가요에서도 이제는 쉽게 뜻 모를 언어들이 난무하면서도 일정한 지지를 받게 되는 현상이 그러하고 서사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를 문학작품에서,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그런 현상은 심화되어 나타난다. 이제 시각언어를 기반으로 한다는 현대미술에서도 이미지에 붙어있어야 할 어떤 지문도 일상성을 기만한지 오래다. 이를 두고 우리는 소통의 부재라 하고 있다. 이 때 우리는 소통이 단순하게 뜻 전달의 오류에서 온다고 순진하게 믿지는 않는다. 다른 문화를 하나의 문화권에서 혼종하려는 무모함 때문에 이 현상은 지속되는 것이다. 소통의 부재는 말과 뜻이 불일치를 보일 때, 실제함이 사실과 유리되어질 때 드러난다. 시각예술은 의미를 드러냄으로 이 불일치를 극복할 수 있었는데, 의미를 스스로 거두어들인 오늘의 시각예술은 표상된 세계의 단면, 보여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역할이 없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제 또 다른 말을 해야만 한다.

비일상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현상들은 삶의 자리에 상관없는 온갖 수사들이다. 우리의 일상은 삶을 스스로 드러내면서 경험적으로 인식되는바 그것이다. 한국에서는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면 그 정황에 따라 인사의 모든 것이 전달된다. 이러한 신체와 정신의 안녕상태를 묻는 인사가 억압구조 안에서는 신체의 안녕이 아니고 정신의 안녕이 아닌 것을 되묻는 것으로 뜻이 변화된다. 여기서 우리는 보충되어야 하는 수사의 현란함이 필요해진다. 이 수사의 현란에 속고 있는 것이 예술가들의 제안들로 드러나고 있고 예술향유자들의 ‘예술사용’으로 왜곡되어 표현되고 있다. 비일상적 언어의 뜻이 삶의 언어를 앞서 가지는 이러한 정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제 우리는 소통 이전에 이해를 앞세워 어떤 구체적 단서를 찾아내지 못할 때 모든 언어는 뜻 없는 ‘어-이-어, 부-푸-부’일 수밖에 없다. 이 고립을 자처하게 한 원인을 사회에서 찾기보다 우선 예술적 행위들에서 찾아보자. 예술은 향유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예술이 사용된 바, 사용해야 할 것으로 바뀌면서 자본의 논리 안으로 몰입되어져 뜻이 필요 없어진다. 물을 담는 용기의 아름다움이 물이 세지 않는 그 일차적 덕을 우선하듯이 예술작품은 삶을 환기시키거나 삶의 자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그 일차적인 미덕이 있었다. 이제 그 잃어버린 부분에서 우리는 단순한 기능성만을 보게 된다. 이 기능우선주의의 판단력은 예술을 기술, 테크닉과 연관 지어서만 기술되고 이해 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테크닉의 어원적 의미는 테크네, 우리에게 보이는 것 그것이 경험된 앎에서 비롯되어져 일치되는 바인 한에서 기술조차도 기능에 앞서 삶과 연관된 앎의 정직성을 우선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예술은 그 삶의 자리에서 지금 수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당연히 현대예술에서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앎에 이르는 바른 길을 묻게 된다. 여기서 묻는 행위는 찾는 행위이며 그리고 이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연관된다.

성태훈의 작품에서 우리는 대조된 정황을 포착하게 된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이해의 틀로서 ‘의미 포착’을 전제하는 작품의 의도는 구성된 요소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뜻이다. 작가가 의도한바 이러한 작품의 구성방식은 적절한 하나의 의미를 전달하는데 성공적이다. 그가 비일상적 언어를 사용함으로 인해 그의 정황인식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언어의 광의로서 이해를 구할 뿐이다. 이 전략은 상당기간 성태훈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소통이 아닌 ‘전달’에 대한 하나의 노림수로 보인다. 그런 측면에서 작품은 일상을 넘어서는 지점에서 공통된 뜻으로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음에 성공적이다. 왜 예술가들의 메시지는 일상을 벗어나려고만 하는가? 왜 삶의 그 긴박성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는가? 왜 말과 뜻 모두 국제화된 이슈 안에서 그 앎의 방식을 ‘통하게’ 하려는가? 길을 묻는 행위는 사용가치를 찾아내는 일이 아니다. 삶을 향유하려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자신을 배려하는 행위이다. 예술가들은 이 배려함에 대하여 가장 원초적이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술가들은 사상가도 아니며 르뽀를 다루는 민첩한 사회고발자도 아니다. 성태훈의 작품을 이 고리로 부터 벗어나 ‘보기’ 시작한다면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제 요소들은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범주화를 통한 일차적 이해를 가지고 말과 뜻을 일치시키면서 그의 그림들은 명확한 일상적 언어 안에서 뜻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메시지의 전달과 수용의 문제가 아니라 소통의 문제로 환원이다. 소통은 항상 고통 속에 놓여 있는 삶의 제일 앞자리에서 자신을 배려할 때 가능해진다. 예술가의 작업은 그 가능성을 활짝 열어두는 일이다. 성태훈이 우리에게 소통하고자 함은 비일상적 언어인 ‘미국’이나 ‘전쟁’이 아니라 일상적 언어로 돌아와서야 그 뜻을 알 수 있는 ‘(어디에서 사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바로 그)삶의 아픔’이거나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바로 그)삶의 모순된 지금’에 대해서다. 이 소통은 좀 더 정교하게 구사되어야 하겠지만 그의 시도하는바 그 지향이 분명 우리시대의 예술가로서 옳은 길이다. 길을 묻는 행위의 동기에 예술이 사용대상이 아닌 ‘향유대상에로’에 대한 확신이 함께 놓여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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