梅 一 生 寒 不 賣 香
매화는. 일평생. 추위에. 향을. 팔지. 않는다.
푸르던 하늘은 잿빛으로... 눈부시던 햇살은 어두움으로...
화선지 위에 먹물이 스미듯 그렇게 모든 것들이 번져가는 비 내리는 날이었다.
세상은 전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음과 같은 천둥의 굉음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듯한 벼락의 번쩍임이 천지를 절단시키고 있었다.
마치 전쟁이 재현되고 있는 듯한 혼탁한 거리에 길을 잃은 한 방랑자가 헤매인다.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옷깃에 젖어드는 차가운 빗물의 억압에 짓눌린 채,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방랑자의 흐린 시야는 어느 순간 길모퉁이에 고요히 불 켜진 전시장을 향해 고정된다.
‘길. 을. 묻. 는. 다’
전시장을 들어서는 입구 벽면 포스터에 쓰여진 이 문구는 길을 잃은 방랑자에게는 생의 벼랑 끝에서 만난 한줄기의 빛이었다. 방랑자는 자석에 이끌리듯 전시장 문턱을 들어선다.
무의식적으로 이끌린 전시장, 그곳에는 화선지 위에 매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평화로운 매화는 사방이 어여쁜 나비가 아닌 잔혹한 대량살상무기인 전투기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림아래에는 ‘매화는 일평생 추위에 향을 팔지 않는다.’라고 쓰여져 있다. 바로 성태훈 작가의 그림이었다.
방랑자에게 한참을 몰입하게 한 그의 그림은 그렇게 無의 화선지 위에 그려진 세상의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매화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끊이지 않는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전쟁의 상흔이란 아픈 흉터가 심장에 서려있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200여개의 국가들 가운데 마지막 분단군가인 대한민국. 이러한 역사적 굴레 內에 한 예술가로서 生을 살아가는 작가 성태훈은 과거 역사의 반추를 통해 역사적 서술을, 수묵이 가지는 서정성과 역사의 서사성을 통한 조형적인 결합을 시도했다. 또한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는 9.11 테러의 모습을 마치 즐거운 놀이를 바라보듯 응시하는 딸의 모습에 충격적인 전율을 체험하고, 그 후 인습적 주제의 범주를 넘어 테러와 전쟁의 위협과 폭력성 가운데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일상적 삶과 심리적 불안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최근의 작업들은 일상에서의 여러 식물들과 사군자를 응용하여 평화로운 동양화 위에 두려움과 불안의 심상을 드러내는 전투기의 형상을 개입시킨다. 여기서 전투기는 우리를 위협하는 상징물을 극대화한 표현인 것이다. 작가는 그러나 테러와 폭력, 전쟁으로 일그러진 현대의 상황을 은유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고 있는 잔혹한 폭력과 테러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끝없이 고민한다. 그래서 작가 성태훈의 화폭에서는 이러한 고민의 처절한 흔적이 엿보인다.
無의 宇宙 위에 서서히 먹이 스민다. 스치는 붓 길을 따라 서서히 그 형체를 드러낸다.
잿빛의 점들과 사선의 형상은 모진 비바람과 시린 겨울의 눈보라를 상징하고 있으며, 새하얀 화선지는 혼탁한 세상으로 물들어가며, 위협적인 전투기들은 금방이라도 폭탄을 터트릴 듯한 태세를 취하고 있다. 정적인 동양화 위에 표현될 수 있는 극도의 위태로운 상황이다. 그러나 희망을 잃어 보이는 칠흑과 같은 화폭의 어둠 가운데에서도 서서히...서서히...무언가피어오른다. 일평생 어떠한 추위에도 결코 향을 팔지 않는다는 매화, 온갖 시름과 고통을 뚫고 오랜 기다림 끝에 혼신을 다해 아름다움으로 피어오른다.
여기서 작가 성태훈의 작품에 그려진 매화는 테러와 폭력 그리고 전쟁의 위협에 떨고 있는 지금의 ‘현 세계상’, 전쟁의 가능성이 늘 도사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 그리고 전쟁과 같은 일상 속에서도 언제까지나 평화는 허락되지 않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은유이다. 또한 작품 속의 매화, 그리고 눈과 비바람을 연상케 하는 배경의 무수한 점들과 선, 위협적인전투기들은 이러한 상황을 극대화 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가 작품을 통해진정 말하고자 하는 것은 수없이 찍혀진 점들과 사선으로 그어진 선들, 날카로운 전투기를 통해 현 세계의 험난한 폭력성과 혼탁함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라기보다 모진 눈과 비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꽃을 피우며,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도 소리없이 희고 맑은 꽃을 피우는 매화의 절개이다. 나라가 혼란스럽고 위기에 처했을 때 옛 선비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매화의 품모를 폭력이 난재하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대처해야 할 자세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시인 이육사는 당시 우리 민족의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모든 천지만물은 추위에 굴복하여 숨죽이고 있으나 긴 겨울, 매서운 추위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움트리지 않고 홀로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향기를 품어내는 매화의 절개를 통해 조국광복에 대한 확신과 믿음의 의지를 드러내며, 죽음으로써 끝까지 일제에 항거한 시인이다. 매화는 옛 선비들에게도 그러하였듯 시인에게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해주었고, 가난한 노래의 씨앗을 뿌리게 하였다. 한 시인이 뿌린 그 씨앗이 새싹을 돋아내어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것 인지도 모른다. 이육사 <광야>의 일부분이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또 다시 칼날같이 몰아치는 비바람은 섬뜩하게 번뜩이는 낙뢰와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로 우리를 위협하며 두려움에 떨게한다. 그러나 오늘과 같은 날에도 한 작가의 작업실 전등불빛은 밤을 지새도록 꺼지지 않고 화선지 위에 붓 길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매화는 일평생 추위에도 향을 팔지 않는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다. 작가 성태훈의 화폭에 피어나는 그 매화가 오늘과 같은 극한 상황의 세상 한 가운데에서도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전령사가 되어 줄 것이라 믿으며...
Plum Blossoms Do Not Give Away Their Scent, Despite the Coldness of Life
[By Seo Young-ju (Art Science, Curator)]
The blue sky turns into grey…. Shining sunlight turns into darkness….
It was a rainy day when everything changed like ink spreading and soaking into Korean paper. Thunder crashed like the explosive sounds emitted from a fighter plane or the claps of lighting and thunder that split the world in half, as if they were about to turn all existence into ashes.
A wanderer rambles along losing his way in a murky street where the traces of warfare seem to be everywhere. After wandering for a while with no umbrella, being suppressed by the heaviness of the cold raindrops soaking into his clothes and despite his blurry sight, in an instant, this wanderer focuses his eyes on an exhibition hall around the corner that is silently lit.
‘Ask Where to Go’
This phrase from the poster pasted on the entrance of the exhibit is like a ray of light met on the edge of the world. He enters the exhibition hall as if being drawn in by a magnet. Unconsciously lured to the hall, there is a plum blossom painting done on Korean paper. However, the peaceful plum blossom is surrounded by fighter planes and lethal weapons of mass destruction, not by beautiful butterflies, along with the caption ‘Plum Blossoms Do Not Give Away Their Scent, Despite the Coldness of Life.’ written under the painting. It was painted by Seong Tae-hun. The painting that captures the wanderer delivers a symbolic message about plum blossoms that never surrender in the face of the array of hardships and adversities painted on the empty Korean paper.
The Republic of Korea is the last divided country among the 200 countries on earth with the scar of warfare from endless invasions by other nations strewn across its heart. Seong, leading a career as a struggling artist, has made an attempt to combine historical narrative with emotional resonance by looking back on past history. In addition to this, after experiencing shock and terror watching his daughter witness footage of 9/11 as a kind of amusing game, Seong started to make work about our daily livelihood and everyday psychological uneasiness. His recent works reveal imagery of fear and insecurity in understated Korean paintings of the Four Gracious Plants and other various types of vegetation seen around us using fighter planes as symbols of threat and fear. Seong struggles with how these threats can be dealt with beyond the metaphorical depiction of current situations devastated with terror, violence and warfare. Therefore, Seong’s canvases contain the marks of gruesomeness.
Ink spreads into the empty universe along with the shapes of running brushstrokes delicately drawn. Grey dots and diagonal shapes symbolize an intense rainstorm or snowstorm of a fierce winter and the snow-white Korean paper turns into a corrupt, tainted world, where threatening fighters are about to launch exploding bombs. Seong has brought an extreme level of tension to the usually calm and serene Korean painting. However, here, the plum blossoms flower gradually in the midst of the darkness of a canvas which has seemingly lost all hope. An energy that outgrows concerns and distress helps the buds of each branch open with all their power.
The current situation of the world, being constantly exposed to the threats of terror, violence and warfare, does not allow the people of Korea, who are surrounded by the possibility of the confrontational warfare, to enjoy the true meaning of peace in their daily lives. In addition to this, the plum blossoms, acting as the persona of the artist, the numerous dots and lines reminding us of snow storms, and the images of threatening fighter planes together maximize the drama of the situation.
The artist, however, wants to emphasize the integrity of the gracious flower, which does not succumb to rain, snow, or extreme coldness, and he suggests that the strength of the flower should remind us of the spirit that our ancestors maintained during the crisis times in our country’s past. He uses this as a metaphor to express the attitude that we should live with in this era filled with violence.
ee Yuk-sa, a well-known poet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rebelled against the Japanese colonization without fear of death, expressing his confidence and faith in the emancipation of our country in spite of the desperate reality of the situation. Lee never threw his hope away and kept planting the seeds of his poverty-stricken verses. And the grasses sprouted from these seeds may have allowed us to lead our current lives. The following is from Gwang ya by Lee Yuk-sa:
Snow falls
Among the lonely scent of plum blossoms,
As I plant the seeds for these poverty-stricken verses
There will no doubt be more fear and threats facing us like the flashing blade or rumbles of a thunderbolt, but the plum blossoms in Seong Tae-hun’s work will remain as the herald of spring in the midst of our extremely gruesome 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