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노암(아트스페이스휴, 비영리전시공간협의회 대표)
“닭은 날고 새벽은 오고”
닭이 홰를 치는 까닭
정체성은 현대예술의 핵심 키워드이다. 또 거의 모든 철학은 자기인식의 문제로 향한다. 현대예술이 50-60년대 이후 평론가들이 토로했듯 이론(철학)의 도움 없이는 불가해한 문화현상이라는 생각에 동의한다면, 오늘날 예술가들은 자기인식 또는 정체성을 둘러싼 비의와 이를 규명하고 이해하려는 이론투쟁에 어떤 형태로든 발을 담그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과 확인 절차를 통해 점차 복잡하면서도 보다 조밀하게 유기적으로 결합된 자아를 만들어간다. 그것은 점차 견고해진 미적 자율성과 보수성을 자연스럽게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성태훈은 아직도 그 변화의 과정에 자기 자신을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조금씩 그리고 분명하게 변화를 모색하면서 새로운 스타일의 한국화를 제시하려 한다. 이러한 변화와 진화의 시도는 미적 표현의 세계에서는 철저하게 독립적이어야 한다. 상대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그러한 내적 동기에서 비롯되어야하고 또 거기에서 효과적인 조형적 실험과 비약이 가능하다. 집단적 창작은 관념적으로는 가능하나 실제 사물과 재료 속에 들어가 그를 뒤섞고 새로운 결합법칙을 발견하는 것은 실제 고독하며 장인적인 노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장구한 정신과 육체의 노동과 집중의 과정을 거쳐 산출된 것들, 사건이나 현상을 단기간에 바로 해석하고 규정, 단언하는 것은 사려 깊은 태도가 아니다. 무언가 과거에 이미 형성된 개념이나 이론 또는 패러다임으로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에 대해 두려워해 빨리 빨리 형태를 부여하려는 것은 이론적이지도 또 현명하지도 않다. 그것은 다만 두려움의 표현일 뿐이다.
작품이나 작가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새로운 미적 사건, 미술현상이 등장하는 것을 기꺼이 반길 일이다. 그것은 도전이고 흥미진진한 사건이다. 또 그 순간의 목격자, 그 장소의 참여자로 경험과 공감을 공유한다는 것은 기쁨이고 영광이다. 더욱이 상서로운 징조로 받아들이는 태도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균형을 상실한 열광 또한 일시적이고 신뢰할 만하지도 않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고 공으로 되는 것은 없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예술계에도 대체로 타당하다. 선입견 없는 만남과 분별 있는 대화, 그리고 시간에 익숙한 것도 이런 시각과 태도를 강화하고 성장시킨다.
이런 과정에 새로운 작품과 작가들이 나타나고 발견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러한 발견 또는 발견된 작품이나 작가의 의미를 적절히 설명할 이론을 만들지는 못한 것 같다. 무수히 보고되는 목격, 관찰, 경험, 에피소드들이 급속히 쌓이고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비록 임시방편일지는 모르나 감각적이며 설득적인 표현과 의견(opinion)이 만족스럽게 제시된 것도 아니다. 몰입과 감동은커녕 해석의 한계를 반복할 뿐이다.
상황을 고려해 보면 최근 몇 년간 지속된 성태훈의 ‘날아라 닭’시리즈는 매우 성공적인 것처럼 보인다. 우화적 내러티브가 흐르면서 보는 이들이 한편의 잘 짜인 이야기를 즐기듯 불편함 없이 다가가게 만든다. 시각문화의 전반적인 경향이 좀 더 ‘이야기성’이 강조되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것을 회화적인 본령에서 멀어졌다거나 또는 너무 연극적이라서 시각적 이미지와 조형언어를 감상하는데 거추장스럽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씁쓸하지만 그것이 모든 이미지 생산자들의 논리적 환경이자 숙명이긴 하다.
번지점프하기
돌아보면, 작가는 2000년대 들어서 ‘한국화의 위기’ 또는 ‘담론의 위기’에 대한 적극적이며 전향적인 태도를 견지하려 했다. 2003년 대안공간 아트스페이스 휴의 ‘한국화 번지점프’展의 파트너로 공동 기획하기도 하며 새로운 한국화가들을 소개하고 이슈화하고자 했었다. ‘한국화 번지점프’展은 이후 다른 공간에서 두 번 더 기획되었다. ‘날아라 닭’시리즈의 매화가지 위에서 뛰어내리는 닭의 모티브가 이 번지점프를 하는 한국화라는 발상에서 기원하지 않았는지 추측해 볼 수 있다.
자칫 한국성이니 한국화의 정체성이니 하며 정작 예술형식마다 각기 다른 고유한 특성과 문화의 상대성, 현대미술문화의 국제성에 대한 비합리적 곡해(曲解)와 적대(敵對)는 시대착오적 감각을 반증할 뿐이다. 이러한 한국화분야의 보수성은 최근 들어 대중문화의 아이콘이나 이미지, 내러티브를 수용하는 작가들의 등장으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고 있다. 이제는 서구적 표현과 미적 이념에 대한 배제와 무관심에서 벗어나 함께 융합하여 한국화의 새로운 활력과 미적 다양성을 획득하는데 활용하고 있다. 조형언어의 복잡성과 문화적 상대성이 심리적 불편함 없이 수용되면서 새로운 유형의 한국화가들이 배출되고 있고 성태훈 또한 그러한 변화의 흐름에 속한다.
과거에 비해 정보와 이미지, 사물과 재료의 풍요 속에서 우리는 굳이 높이 그리고 멀리 날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니 자신이 다루는 재료와 물질의 속성과 그 한계와 충돌하고 대결하는 것은 날개나 다리가 부러지는 골절이나 머리가 어떻게 되는 뇌진탕의 위험에도 닭이 뛰어내리고 오르는 것의 비유이다.
닭은 오랜 기간 진화과정과 다른 종들과의 적자생존을 통해 땅에 발을 딛고 활보하는 것이다. 경쟁사회의 인간처럼 닭들은 경쟁을 한다. 경쟁은 자연법칙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높이 날고자 하는 닭은 매우 기이하며 돌연변이로 간주된다. 그러니 닭은 작가 자신의 알레고리일 수밖에 없다. 이런 비유를 통해 우리는 한국화의 위기에 대응하는 다양한 태도와 미적 입장을 은유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날아라 닭’ 시리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닭과 매화의 결합은 성태훈이 바라보는 세상과 삶, 예술과 예술가상 등에 대한 고유한 태도로 시각적 문법을 만든다. 닭은 목이 길지도 또 날개가 길지도 않으나 12지신 중 하나이며 신화 속 봉황과 상징적 연결고리를 지닌 까닭에 가금류 중의 왕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닭은 프랑스의 상징동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닭은 자연에 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문화적 존재이다. 또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자연과 운명의 운행에 대한 확고한 믿음도 연상케 한다.
작가들 사이에서는 재료와 갈등하지 않는 이미지는 일종의 횡설수설일 뿐이라는 미술사의 풍문이 있다. 성태훈은 이런 점에서 매우 모범적인 갈등조장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번 신작에서 먹을 바탕에 깔고 그 위에 모델링페이스트를 두껍게 얹은 후 붓이 아닌 붓대의 뒷부분으로 긁어내어 매화 가지를 표현하는 것과 손가락의 지문으로 매화를 표현하는 시도는 새로운 시도이기에 좀 더 시간을 요하는 감상과 비평이 필요해진다.
지루한 그러나 끈기 있는 비평과 조우하길 기다리는 사이, 원망형의 ‘날아라 닭’은 어느새 ‘닭 날다’로 변화했다. 폐허와 소녀, 불안과 공포 그리고 닭과 매화. 지난 16회의 개인전에서 나타나는 성태훈의 이미지는 단순히 수묵화의 전통이나 한국화의 위기를 극복하거나 재건하려는 근면성실의 문제를 벗어나 오늘 하루의 진실한 삶과 만남, 의미 등을 향한다.
성태훈은 선배 기러기들의 충고에도 비상을 꿈꾸는 조너던 리빙스턴의 낭만적 빙의처럼 뛰어오르고 뛰어내린다. 실제로 날 수 있는 종류도 있다는데 어째든 닭이 날고자하면 이렇게도 홰를 쳐보고 저렇게도 홰를 쳐보는 것이다. 거기에 비범(非凡)이 홰를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