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닭”
박천남(미술평론, 성남문화재단 전시기획부장)
닭이 날고 있다. 도처에서 닭들이 날고 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성태훈의 작업실에서 만난 이런저런 작품마다 닭들이 하늘을 날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몸집이 작고 그다지 정교하지 않아 일견 산수풍경 속 작은 새 정도로 보일 수 있다. 성태훈 작업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화면 속 이들이 지닌 몇몇 특징과 공통점, 이를테면 짧은 목과 벼슬, 제법 두툼한 몸통 등을 살피고 나면 이내 이들이 닭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성태훈의 닭은 두 가지 모습으로 화면에 등장한다. 힘차고 경쾌하게 단독으로 허공을 날고 있거나, 무리를 지어 유영(遊泳)하듯 리드미컬하게 하늘을 나는 모습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무언가를 향해 돌진하듯 공격적으로, 때론 평화롭기 그지없는 표정과 질서를 유지하며 각기 화면에 자리한다. 홀로 나는 닭은 작가 자신의 현실과 처지를 반영한 것으로 보이며 일련의 닭 무리를 이끄는 닭 역시 가족의 안위와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역할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된다. 선홍색 머리벼슬과 수염벼슬을 가지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들 모두가 수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화면 속 닭은 새벽, 혹은 늦은 오후로 보이는 어둑한 하늘을 힘차게 가르고 있다. 이들 닭들의 표정은 기운 센 모습과 퀭한 표정, 바싹 긴장한 모습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피로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일터로 향하거나 하루 일에 지쳐 귀가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 녹록치 않은 현실을 떠나거나 벗어나려는 장면이라기보다는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기꺼이 떨치고 나서는 형국일 수도 있다. 제법 몸이 무거워 보이는 닭이 보기 좋게, 때론 천진난만하게 나는 모습이 정겹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닭은 자유로이 날지 못한다. 순간적으로 짧은 거리는 날지만, 멀리 그리고 높이 본격적으로 훨훨 날지는 못한다. 울타리 내 횟대 정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등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나는 정도다. 시원하게 하늘을 가르며 나는 모습을 좀처럼 보여주질 못한다. 닭은 원래 공중을 나는 태생이었다. 가금류로 길들여지면서 날개의 기능과 의지가 퇴화한 것으로 보인다. 과연 용불용설(用不用說)을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어쩌면 닭들 스스로가 먹고 사는 문제에 따른 보호받는(?) 삶을 택한 이유도 한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닭이 가금류라는 인식을 받아들이고 안주의 틀 안에 스스로 자리하면서 고유의 특정 형질에 변화가 생긴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점진적으로 길들여지는 과정으로 인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닭 모양으로의 완전한 형질 전환, 체질변화를 겪은 것이다. 본성을 되찾으려 뒤늦은 노력을 하지만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질과 타율, 외세와의 타협에 주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닭과 같은 점진적 변화를 겪을 것이고 종국에는 형질과 체질이 완전히 전환된, 이른바 닭대가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성태훈이 닭을 집요하게 탐(探)하고 있는 것은 세상사에 시달리며 자칫 작가로서의 형질이 약화되고 축소되어나갈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자신의 작업과 삶의 지형에 배어 있을지도 모르는 물리적/심리적 흔적들을 예의 경계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의 화면 속 다양한 표정과 동세의 닭들은 작가와 가장으로서의 야생형질과 체질, 즉 초심과 책임감을 되찾으려는 지성적 노력에 다름 아니다. 성태훈은 자신의 작업을 간단없이 이어나가기 위해 상당한 인고의 시간을 보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특유의 예술형질을 체득했으며 유전자 염기서열 구조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이른바 작가적 천성을 발견하고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작가로서 인내해야할 고통이자 감당해야할 삶의 무게가 무엇인지를 곱씹었던 시간이었다. 닭을 만난 북한강변 시절의 작업공간은 난다는 것이 무엇이고 언제 날아야 할지를, 어디로 날아야 할지를 반성적으로 깨달은 시공간이었다.
닭과 가까이 살았던 경험은 과연 소중했다. 닭의 사회성에 대한 오랜 관찰의 결과는 닭을 작업의 화제로 삼기에 충분했다. 닭은 그 어떤 맹금류보다도 시력이 뛰어나며 넓은 시야를 가졌다. 그가 만난 닭은 닭대가리라는 말로 대변되는 잘못된 인식과 달리 영리하고 나름의 판단 능력을 지녔다. 닭들의 일시적 날개짓은 다른 세상을 위해 멀리 날려는 의도보다는 상대방을 제압하거나 혹은 위급 상황을 피하려는 면피용 호들갑에 가깝다는 것도 받아 들였다. 길들여지지 않는 본래적 감성을 회복하려는 자성적 몸짓이 주요함을 깨달았다. 과연 새는 높이 날아야함도 아니요, 멀리 날아야함도 아니다. 다만 날 때 날아야 함이라는 것을 확인한 강변시절이었다.
성태훈의 작업은 일종의 현실풍경이다. 퀭한 표정의 황량한 들녘에 스러질 힘도 없는 마른 나무들이 현실을 버티고 서 있다. 작가의 내면 풍경이자 당대풍경이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쓸쓸하게 놓여 있는 버려진 들판이자 빼앗긴 들녘이다. 들녘의 모습은 시나브로 고유의 야생형질이 사라져 감을 인지하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한 결과, 형질과 체질이 완전히 변화된 황량한 현실태에 다름 아니다. 화면 가득 황량하고 을씨년스런 분위기가 맴돈다. 춘래불사춘이라 헸던가, 때아닌 삭풍(朔風)이 휘몰아친다.
성태훈은 반성하듯, 또는 보란 듯 아픈 들녘 위를 유영한다. 황폐한 물리적 풍경, 덧없고 삭막한 현실 위로 평화로이 보란 듯 힘차게 날고 있다. 화면 속, 들녘과 닭들의 울음소리와 의사를 전달하려는 보이지 않는 대화가 오간다. 닭의 움직임과 울음소리로 공허한 들판과 세상을 향해 무언가를 말하려는 성태훈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들린다. 혹자에게 그것은 화면의 구색(具色) 정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자칫 안주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세상의 안락한 횟대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은 그가 그만큼 건강하고 밝다는 증거일 것이다.
성태훈은 옻을 사용한다. 진화하는 재료와 형식의 다양한 메커니즘 속에서 우연히 발견했거나 치기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가 겪어온 다양한 삶의 질곡과 제작충동으로부터 비롯한 변화일 것이다. 오늘도 무기물에서 유기물, 유기물에서 무기물 사이를 넘나들며 제작 활동을 이어간다. 옻이라는 재료의 성결과 성질이 이끄는대로, 혹은 그러한 것들을 거스르며 닭이라는 감정이입태를 통해 황량한 현실에 맞선다. 옻이라는 치명적 유혹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현실극복의지와 창작본능을 자극하고 일깨운다. 날것을 통해 날것 느낌을 회복하려하는 것이다.
옻작업은 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했지만, 배우기 시작한 지는 올 해로 만 6년 이 되어간다. 닭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작업에의 반영은 앞서 말했듯이 7년여 전 북한강변에 자리를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관심과 작업은 ‘킵워킹펀드(keep walking fund)’라는 상을 수상하면서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프랑스 등 해외전시에서도 호평을 받았으며 해가 거듭할수록 옻칠의 깊이감과 함께 정신적 깊이감을 더하고 있다. 오늘도 새벽들녘과 닭, 병아리 등과 같은 새로운 생명과 가능성의 기운을 옻으로 얹는다. 옻을 경계하던 초기 만남으로부터 어느덧 이제는 옻과 자연스레 동행하고 있다. 새로운 재료에 대한 호기심은 이러저러한 고생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했다. 체질인가 보다.
중국 칭화대에서 옻칠을 전공한 지인을 통해 우연히 접한 옻의 세계는 오늘날의 작업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개화했다. 성태훈의 옻작업은 중국, 일본의 그것과는 달리 달걀껍질과 금박, 자개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금분과 은분 정도는 사용하지만, 사포질과 선묘를 중심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합판에 옻을 입히고 고운 사포로 오랜 시간 갈아낸다. 여기에 붓질을 더하고 벗겨내고 지우는 등의 행위를 반복한다. 먹을 갈 듯 참으로 많은 시간과 인내가 소요된다. 색을 올리고 은분을 섞기도 한다. 무겁고 어두운 느낌에서 밝고 환한 느낌에 이르기까지 오묘한 톤을 불러낸다. 옻을 말리기 위해 습한 기운도 마다 않는다. 이러한 일련의 공정은 앞뒤 패널 사이의 완전한 진공을 만들어 낸다. 그의 옻은 가히 수 천 년을 갈 것이다. 탱크 등을 그리던 작가 초기시절의 성태훈은 이렇게 자신을 스스로 갈아내며 타율에 의하지 않고 자발적인 체질개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성태훈은 어둠을 뚫고 밝은 내일을 위해 힘차게 날고 있다. 옻의 화가, 닭의 화가, 옻닭의 화가 성태훈. 그가 담아낸 것은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가 날고 있을 또다른 세상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