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풍경 앞에 “길을 묻는다“
변길현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관)
장인은 날지 않는 닭이고, 예술가는 날을 수 있는 닭이다. 장인도 날수 있겠지만 굳이 날려 하지 않는다. 굳이 날지 않고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겠기도 하고, 그 이전에 예술에 대한 필요성이랄까, 철학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에게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작품판매를 위해 만들어진 철학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고 역사 체험이 결여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은 고객의 기호에 맞춰 무한 반복되는 성향이 있다. 사간동의 일부 고급화랑에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는 현존하고 있는 원로장인들의 작품들을 보라. 1960~70년대부터 이어지고 있는 화풍이다. 그들은 비슷한 그림을 무한반복하면서 그려대고 있다. 물론 그들을 지탱해주는 것은 미술계의 고급 네트워크이다. 그들은 예술가라기보다는 사업가이자 장인이다.
반면에 예술가는 후원자가 없이는 대개는 가난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가 예술창작행위를 하는 것은 먹고살기 위한 생존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실존적 행위로서 그것만이 자신이 세상을 살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즉, 다른 직업을 가지고는 제대로 사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일종의 무당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가난할 운명인 것을 알지만 운명적으로 택할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무당이 작두를 타듯, 무당이 접신을 하듯 극한적 상황까지 도달하여 거기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예술가이다. 그러므로 예술가의 작품에는 인간의 고통과 체험이 담겨있고, 그런 작품을 통해 우리는 위로를 받는다. 예술가는 하늘과 땅의 매개자이며, 진정한 예술가는 그의 삶과 작품을 분리할 수 없다.
성태훈은 동학현장과 5·18, 9·11 등 역사 속 실경을 그리면서 그림을 시작하였다. 보통은 금강산 같은 명산의 실경산수, 혹은 도시 속 감성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세태였음을 감안하면 성태훈은 원대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듯싶다. 홍대 동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처음 시작한 개인전이 동학과 5·18이 일어났던 장소를 찾아가 실경을 그린 『역사현장-실경』전(1999, 웅전갤러리)이었다. 두 번 째 개인전은 『유배지 역사현장 기행』전(2000, 공평아트센터). 세 번 째 개인전은 『역사현장-공존』전(2002, 공평아트센터)였다. 그의 기초적 세계관으로서 이때의 작품들은 중요하다. 「광주 도청」(1999)은 20세기말 광주를 바라보는 세기말의 암울한 시각이 담겨져 있고,「윤서-씻다」(2002)는 2011년 9․11 테러를 바라보는 역사적 체험자로서의 작가가 사랑하는 딸의 씻는 의식을 통해 죽은 자를 위로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갈망하는 씻김굿과 같은 그림이다. 단순한 고발이나 선전선동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보는 사람의 가슴을 위로한다는데 초창기 그의 그림의 특징이 있었다.
사람을 깊어지게 하는 것은 고독이다. 예술가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과정을 겪어야 홀로 작업에 매진할 수 있으며, 일정한 경지에 올라갈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재료를 가지고 노는 단계에 이를 수 있다. 초기의 포부 큰 그림은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그가 한 단계 더 성숙한 예술가로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더불어 고리타분하게 여겨지던 한국화의 변화는 그가 늘 꿈꾸던 과제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003년 한국 독립큐레이터계의 브레인 김노암과 함께 기획한 “한국화 번지점프”전은 젊은 한국화가들의 새로운 작업들을 보여주는 전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성태훈 스스로 번지점프하듯 한국화의 고정적 형식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지속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작품은 팔리지 않았다. 직업화가로서의 고민은 그를 아프게 했고, 그 아픔이 그의 또 다른 힘이 되었다. 이때 행해진, 『벽으로부터의 반추』(2004-2005) 시리즈는 예술가로서의 자기를 돌아보는 시기였다. 오늘날 성태훈 하면 연상이 되는 작품들은 이러한 면벽수행에 가까운 예술가로서의 성실한 연습과 수행, 사색 끝에 잉태된 것이다. 2005년 무렵 가난과 개인적 불행이 그를 남양주 북한강가로 이끌었다. 대학 은사의 소개로 얻게 된 시골 작업실에서 그는 작업에 순수하게 매진하게 된다. 아무도 찾는 이 없는 환경이, 가난이, 고독이, 그를 더 깊어지게 했다.
이 시기 제작된『길을 묻는다』시리즈 (2006)는 시대풍경을 마주한 작가의 사색과 수행이 빚어낸 작품들이었다. 목욕탕, 세면대 같은 우리들의 일상 풍경에서도, 난초, 대나무, 매화와 같은 미적 공간에서도, 휴일을 맞아 찾는 산에서도 항공모함, 전투기, 아파치 헬리콥터 등이 등장한다. 많은 작가들이 그의 아파치 헬기 등을 차용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는 우리의 일상을 괴롭히는 모기와 같은 존재로서 헬기를 한국화에 집어넣었다고 했지만, 초창기 동학 현장부터 섭렵한 그의 이력을 볼 때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헬기나 전투기들은 당연히 우리의 일상과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초강대국의 그것에 다름 아니다. 은유도 아니고 직유로서 말이다. 그는 묻고 있었다. 우리의 길은 어디인가? 민중미술의 리얼리즘과 다르게 그는 새로운 한국화의 전략으로 우리의 길을 예술적 방식으로 제시하였다.
이어서 제작된 『날아라 닭』시리즈 (2008)는 보다 그의 내면에 가까운 작품들이었다. 앞서 『길을 묻는다』 시리즈가 서사적이며 역사적인 작품이라면, 『날아라 닭』시리즈는 앞 시리즈에서 진화되어 역사와 예술가의 관계를 묻는 작품이었다. 전투기와 아파치 헬기가 사라지고, 대신 전통적인 매화와 날고 있는 닭이 등장했지만, 배경은 전쟁이나 재해로 파괴된 역사의 현장이다. 그는 남양주 작업실에서 소일거리 삼아 닭을 키우면서 닭의 성질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닭을 예술가 자신이나 보통 사람들을 비유하는 상징으로 사용하였지만, 닭은 자연(自然)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자연의 성질을 담고 있고 ‘스스로 그러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동물이다. 그가 그리는 닭은 우리가 천대하는 그러한 닭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담고 있는 문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존재인 것이다. 가난한 예술가가 뜨기를 원해서 닭이 날기를 원했던 것일까? 그는 생활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의 상징, 희망의 상징으로서 닭을 그렸을 것이다. 그의 그림에는 심지어 병아리도 난다. 그의 사람됨처럼 그의 그림에는 풍자와 해학이 있다.
그는 2011년 무렵부터 그림의 재료로서 옻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종이와 먹을 쓰던 그가 판자와 옻으로 재료를 변화시킨 것이다. 당연히 옻은 그림의 재료로 사용하기에는 아주 고약한 것이다. 한국화처럼 일필휘지할 수가 없다. 재료의 변화는 작가에게 있어 가히 혁명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가 한국화의 끊임없는 변화를 모색하는 작가라는 것을 말해준다. 제작하기는 어렵지만 옻의 효과는 탁월하다. 먹으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느낌, 수 천년을 이어져도 그대로인 깊이감이 그것이다. 앞서 『날아라 닭』 시리즈의 폐허 같은 배경은 옻을 도드라지도록 두텁게 발라 묘사한 나무나 수풀의 어두움으로 대치되었다. 더욱 추상화된 것이다. 그 위의 배경은 파란 색부터 빨간 색까지 다양하며, 어떨 때는 선명하게 어떨 때는 흐리거나 이중적으로 표현된다. 그 위를 닭이나 병아리가 나는 것은 같으나 철새처럼 실루엣만 보이며 멀리서 날고 있다. 희망은 더욱 원대해졌고, 이제 가히 마음을 비우고 그림을 그리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어느 방송사에서는 그를 일컬어 옻칠화가라고 칭하였지만, 이는 그의 부분만을 본 것이다. 재료로써 예술가를 칭하는 것은 정당한 호칭이 아니다. 그는 변화를 모색하여 새로운 미감을 창출하는 예술가이지, 장인이 아니다. 예컨대, 그는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길을 묻는 예술가인 것이다.
2016. 9.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