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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이 비처럼

: 현실은 색채로 해석된다

 

김노암

 

1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면 이런 풍경일까? 꽃가루가 흩날리는 일상적 장면과 달리, 꽃이 비처럼 쏟아지는 풍경은 우리의 마음을 어떤 특별한 시공간으로 옮겨놓는다. 배창호 감독의 영화 (1990)’이 보여준 비현실적 미감이 화면 위로 펼쳐진다. 우리는 모두 꿈을 꾸고 있거나, 수많은 꿈의 세계와 차원을 건너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일본 영화 ‘4월 이야기속 결혼식 장면을 뒤덮었던 벚꽃의 향기가 지금도 진동하는 듯하다. 그것은 눈으로 감각하는 시각의 향기이며, 정신과 영혼으로 마주하는 내음이다.

 

꽃은 짧은 순간 피고 진다. 그 탄생과 소멸의 찰나를 경험하는 것은 우주적 생령(生靈)의 순환 속에 잠시 발을 들이는 일이다. 슬픈 가락과 비극적 서사를 품은 노래 꽃잎또한 작가의 꽃비와 어우러져 군무를 춘다. 특별한 사건과 경험의 순간은 진동하는 향기처럼 화면에 새겨진다. 그 향기 위로 깊은 시간의 주름이 패인다. 지문이나 문신처럼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주름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가. 꽃비는 안개처럼 모든 것을 품는 동시에, 모든 형상을 흐릿하게 지워나간다.

 

꽃비는 지상으로 내려오지만, 동시에 위로 솟구치고 회오리치며 사방으로 분출된다.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춤을 추는 것이다. 인간의 꿈과 운명을 은유하는 이 꽃잎들은 비가 되고 바람이 되며, 운동과 변화 그 자체가 된다. 상하좌우의 관념을 벗어던지고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해체할 때, 꽃비는 어디로든 향할 수 있는 자유로운 지향성을 획득한다. 화면 가득한 꽃잎 사이로 배와 강, 산과 하늘의 풍경이 아스라이 보인다. 그 너머에는 분명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다.

 

2

성태훈 작가는 한국화의 전통 필묵법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 왔다. 특히 날아라 닭시리즈와 옻칠 회화라는 기법을 통해 대중과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세계관이 변모해온 과정은 스스로 옻독을 감내하듯, 고통스러운 역사를 통과해온 화가가 세상에 건네는 치유의 여정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한국화에서 출발해 동서양, 과거와 현재의 문화적 차이를 융합하며 시각적 보편성을 모색한다.

 

작가를 각인시킨 날아라 닭시리즈에서 닭은 생명의 가치를 망각하기 쉬운 존재이자 날지 못하는 새의 형상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비상 능력을 상실한 존재에 화가로서의 처지를 투사하고, 그 존재론적 울림에 공명했다. 그림 속에서 닭들은 밤하늘을 비상하거나 매화나무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이는 고단한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이자,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유토피아적 세계관의 발현이었다.

 

이후 작가는 소멸해 가던 옻칠전통을 현대 회화에 접목한다. 독성이 강해 다루기 까다로운 옻칠은 매끈하고 간편한 재료에 익숙한 현대 미술가들에게 육체적 고통을 동반하는 수행적 도전이었다. 이 작업은 회화가 단순히 조형적 유희가 아니라 화가의 고된 노동과 정성이 깃든 결과물임을 상기시킨다. 옻칠 특유의 견고함과 수묵의 농담을 결합한 그의 시도는 현대 한국화가 나아갈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며, 물질성과 노동의 가치를 효과적으로 복원해냈다.

 

3

서구적 감각으로 본다면 이번 작품들은 모네나 시슬레 등 인상파 화가들의 광학적 탐구, 혹은 모더니즘의 추상화 과정과 겹쳐 보일 수 있다. 색점들이 화면을 평면화하고 시공간을 정지된 순간으로 압축하면, 일상의 현실은 무대의 커튼처럼 불투명한 빛 뒤로 은폐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상은 작가의 초기작을 복기하는 순간 단순한 시각적 몰입을 넘어선다.

 

작가의 초기작은 9·11 테러나 전쟁의 폐허 속을 날아다니는 전투기와 미사일을 다루었다. 20세기의 폭력과 불합리, 고통의 현대사를 바라보는 비판적 역사 의식이 도시의 폐허 위에 그려진 것이다. 당시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던 소녀의 눈빛이나 닭을 따르는 병아리의 모습은 보편적 인류애를 호소했다. 이러한 이력을 알고 나면, 이번 꽃비시리즈는 단순한 미적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가슴 한편에 서늘한 우울과 불편함을 동반하는 기억의 장치가 된다.

 

꽃비앞에서 30년 전 영화 꽃잎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연상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비극 속에서 학대받던 어린 소녀의 이미지는 우리 세대의 기억 속에 날카롭게 각인되어 있다. 세기말의 혼돈과 기이한 역사의 사건들이 꽃비라는 유령처럼 불투명한 이미지와 중첩된다. 초기작에서 보여준 현실 참여 정신과 역사 의식은 이번 연작에서도 그 뿌리를 잇고 있다. 사회적 상처와 자기 학대의 정서를 직시해온 화가는 이제 회화를 통해 따뜻한 공감과 위로를 건네고자 한다.

 

다채로운 색채가 확산하며 만들어내는 복잡한 이미지들은 실재(reality)를 가리는 베일인 동시에,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진실의 통로다. 작가는 전통적 일탈을 감행하면서도 새로운 한국화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시각적 쾌감을 넘어선 묵직한 자기 길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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